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형주 공방전/평가 (문단 편집) === 형주 정벌에 누가 더 큰 공헌을 했는가? === >예주(豫州-유비)의 군이 비록 장판(長阪)에서 패했으나 지금 '''돌아온 전사(戰士-병사)와 관우의 수군(水軍)이 정갑(精甲-정병) 만 명'''이고, 유기(劉琦)가 합한 '''강하의 전사 또한 최소한 만 명'''입니다. >---- >『삼국지』「제갈량전」[[http://rexhistoria.net/history_sam/1307|#]] 흔히 제갈량의 이 발언을 근거로 유비가 적벽대전 당시 2만명의 군사를 동원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2만의 병사는 어디까지나 호왈일 뿐이다. 저 대화 당시에는 손권도 10만 군사를 동원할 수 있다고 얘기했으나 실제로 동원한 병력은 그보다 적었다. 저 발언만으로 손권과 유비가 3만:2만으로 비슷한 군사를 동원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그대의 말이 옳지 않소. 본시 '''장판에서 예주(豫州 유비)를 살펴보았을 때, 예주의 군세는 일교(一校 한 부대)를 이룰 만한 병력에도 차지 않았고''', 계략과 사려는 이미 다하였으며 전의도 기세도 모두 무너진 상태로, 멀리서부터 도망쳐 숨고자 생각할 뿐으로, 도저히 그것(위군을 격파하여 형주를 손에 넣는 것)은 바랄 수 없는 일이었소. >---- >『삼국지』「노숙전」 주석, 「오서」에서 인용 [[http://rexhistoria.net/history_sam/854|#]] 오히려 노숙은 장판에서 본 유비의 군사는 한 부대를 이루지도 못할 정도의 규모였다고 말한다. 이 역시 익양대치 당시 관우에게 한 말이므로 과장이 섞여있을 수 있지만, 제갈량의 말대로 1만 명이나 되기에는 무리라고 볼 수 있다. >선주가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듣고 조공은 정기(精騎-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이를 추격했다. 하루 밤낮에 3백여 리를 달려 당양의 장판(長阪)에 이르렀다. '''선주는 처자를 버리고 제갈량, 장비, 조운 등 수십 기를 이끌고 달아났고''', 조공은 그의 무리들과 치중을 크게 노획했다. > >선주는 한진(漢津)을 비껴 달려가다 관우의 배를 만나 면수(沔水-한수)를 건널 수 있었고, 유표의 장자(長子)인 강하(江夏)태수 '''유기(劉琦)의 군사 만여 명'''을 만나 함께 하구(夏口-한수가 장강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했다. 선주가 제갈량을 보내 손권과 결친했다. > >(중략) > >손권은 '''주유(周瑜), 정보(程普)등 수군(水軍) 수만'''을 보내 선주와 힘을 합해, (주24) 조공과 적벽(赤壁)에서 싸워 이를 대파하고 그 주선(舟船-배)을 불태웠다. > >(중략) >''유비가 물었다,'' > >''“지금 조공을 막으려면 치밀하게 계책을 세워야 할 것이오. 전졸(戰卒-병졸)들은 얼마나 있소?”'' > >''주유가 말했다,'' > >''“3만 명입니다.”'' > >''유비가 말했다,'' > >''“적은 것이 애석하오.”'' > >''주유가 말했다,'' > >''“이 정도면 부리기에 충분합니다. 예주(豫州)께서는 저 주유가 적을 격파하는 것을 보기나 하십시오.”'' > >(중략) > >''유비는 비록 부끄러움을 느끼고 주유를 남다르게 여겼으나 내심 반드시 북군(北軍-조조군)을 격파할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서로 어긋나게 뒤에 남아 관우, 장비와 함께 2천 명을 이끌며 주유에 매이려 하지 않았으니 이를 진퇴(進退)의 계책으로 삼았다.'' - 「강표전」 > >(중략) > >''주유가 남군(南郡)태수가 되자 (장강) 남쪽 기슭의 땅을 갈라 유비에게 주었다. 유비는 따로 유강구(油江口)에 영채를 세우고 그 이름을 공안(公安)으로 고쳤다. 북군(北軍-조조군)에 복종한 유표의 관원, 병사 중 다수가 배반하고 유비에게로 와서 투항했다. 유비는 주유가 나누어 준 땅이 작아 백성들을 안돈하기에 부족하다 하여 다시 손권에게서 형주의 몇 개 군(郡)을 빌렸다.'' - 「강표전」 > >선주는 표를 올려 유기를 형주자사로 삼고 또한 '''남쪽으로 4군(四郡)을 정벌'''했다. 무릉(武陵)태수 김선(金旋), 장사(長沙)태수 한현(韓玄), 계양(桂陽)태수 조범(趙範), 영릉(零陵)태수 유도(劉度)가 모두 항복했다. >---- >『삼국지』 「선주전」 [[http://rexhistoria.net/history_sam/1289|#]] >유표가 죽고 조공이 형주(荊州)를 평정하니, 선주는 번(樊)으로부터 장차 남쪽으로 가 장강을 건너려 하며, 따로 관우를 보내 '''수백 척의 배'''를 타고 가게 해 강릉(劉表)에서 만나기로 했다. 조공이 추격하여 당양(當陽) 장판(長阪)에 이르렀고, 선주는 한진(漢津)으로 비스듬히 나아가다 때마침 관우의 배와 서로 만나게 되어 함께 하구(夏口)에 도착했다. > >(중략) > >손권이 군대를 보내 선주를 도와 조공을 막았고 조공이 군을 이끌고 물러났다. 선주는 강남(江南-장강 남쪽)의 여러 군을 거두어들이고는 으뜸 되는 큰 공훈을 세운 사람들을 봉배(封拜)하니 관우를 양양(襄陽)태수 탕구장군(盪寇將軍)으로 삼아 강북(江北-장강 북쪽)에 주둔하게 했다. >---- >『삼국지』 「관우전」 [[http://rexhistoria.net/history_sam/1322|#]] >이 날, 깃발을 세워 무리를 모으니 '''갑사 1만여 인, 말 1천여 필, 배 3천 소를 얻었다.''' 단계의 죽목을 꺼내와 함선을 꾸미고 띠로 기우니 일이 갖추어졌다. 제장들이 노를 다투니 여승진이 먼저 준비한 것을 꺼내와 배마다 2장씩 주니 다투던 자들이 쉬었다. >---- >『자치통감』 자치통감의 기사는 양무제 소연의 거병 시점이다. 양무제와 삼국시대 사이에 수군의 구성이 크게 달라졌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1척 당 병사의 수는 비슷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배 3천 소에 병사 1만명이다. 비슷한 비율로 어림잡아 보면 많게 잡아 900척이라 했을 때 3천명, 적게 잡아 100척이라 했을 때 340여 명이다. 아무리 많이 잡아도 1만명에는 턱도 없다. >유표가 죽고 조공이 형주(荊州)로 들어오자 선주는 강남(江南-장강 남쪽)으로 달아났다. (※ 208년의 일) 조공이 하루 낮, 하루 밤을 추격하여 당양(當陽-형주 남군 당양현) 장판(長阪)에 이르렀다. 선주는 조공이 갑작스럽게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처자식을 버린 채 달아났고, 장비로 하여금 20기(騎)를 이끌고 뒤를 끊도록 했다. 장비는 물가에 의지한 채 다리를 끊고는 눈을 부릅뜨고 모(矛)를 비껴 잡으며 외쳤다, > >"내가 장익덕이다. 앞으로 나와 생사를 가름하자!" > >감히 접근하는 적군이 아무도 없었고 이 때문에 마침내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 >선주가 강남을 평정한 뒤 장비를 의도태수(宜都太守)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임명하고 신정후(新亭侯)에 봉했고, 그 뒤 남군(南郡)(태수)로 전임시켰다. >---- >『삼국지』 「장비전」 [[http://rexhistoria.net/history_sam/1324|#]] >손권이 크게 기뻐하며 '''주유(周瑜), 정보(程普), 노숙(魯肅) 등 수군 3만을 보내''' 제갈량을 따라 선주에게로 나아가 힘을 합해 조공에 맞서게 했다. > >조공은 적벽(赤壁)에서 패하자 군을 이끌고 업(鄴)으로 돌아갔다. 선주는 마침내 강남(江南-장강 남쪽)을 거두고, 제갈량을 군사중랑장(軍師中郎將)으로 삼아 영릉, 계양, 장사 3군을 감독하며 부세(賦稅)를 거두어 군실(軍實-군대의 무기와 양식)을 채우게 했다. >---- >『삼국지』「제갈량전」 반면 손권군의 규모는 수만이라고 묘사되며 오주전, 주유전에서는 3만이라고 언급된다. Rafe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비는 하구에서 50km 정도 하류인 번구로 이동해서 유기와 합류한다. '''제갈량의 과장이 섞였을 가능성이 높은 발언'''에 따르면 유비가 만 명, 유기가 만 명을 이끌고 있다 했으니 '''그래도 꽤 많은 숫자를 이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들의 군사 질과 사기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다.''' 한수에 있던 수군은 관우가 이끌고 왔지만 그에 비해 훨씬 컸을 가능성이 높은 '''강릉에 있던 양쯔강의 수군은 조조에 손아귀'''에 들어갔다. 따라서 '''유비와 유기가 이끌던 연합병력이 조조의 군세를 상대로 버틸 가능성은 0%에 가까웠고''' 믿을 수 있는 기록인지는 의문이지만 유비의 경우 수평선을 바라보며 손권군의 도달을 하염없이 기다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 >(중략) >화공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든, 이 충격으로 인해 조조군이 흔들릴 때, 주유는 때를 놓치지 않고 경무장 병력으로 조조를 쳤고, 이로써 조조군은 완전한 혼란에 빠져 조조는 퇴각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으며, 이에 대해서는 화용도에서 병들고 약한 자들이 짓밟혀 죽었다는 얘기나, 조조군이 배를 적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 스스로 불을 질러 자침시켜야 했다는 애기가 전해진다. 물론 이 이야기가 사실일 수 있지만 상당수의 형주군 들은 배와 무기를 가지고 상대방에 항복했을 가능성도 있다. > >결국 조조는 원정 계획을 버리고 도망쳐야 했지만 강릉에 상당수의 병력을 남겨놨으며, 원래 유표의 수도인 양양에도 또 다른 병력을 남겨두었다. > >다만 역사와 연의를 비롯한 전래극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역사에서는 주공헌자가 주유와 정보가 지휘한 손권군이며, 치명타는 황개의 화공선이 날렸다는 점과, 조조 진영을 휩쓴 전염병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기록은 주유와 그곳에 달린 배송지의 주석에서 확인되며, 삼국지 위서에서는 아주 약간의 정보만이, 촉서에는 그것보다는 조금 더 많은 정도만 확인될 뿐이다. > >오서 주유전에 실린 강표전에는 조조가 손권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는데 여기서는 병 때문에 스스로 배를 불태우고 퇴각했을 뿐인데 주유가 명성을 얻었다고 불만을 표하고 있다. 이게 강표전에서 말한 것처럼 '''주유를 깎아내리려는 시도'''일 수도 있으나 이런 편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통해 당시 '''주유가 적벽에서의 공으로 막대한 명성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산양공재기의 경우 초기기록 중에는 특이하게도 유비에게 적벽의 주된 공적을 돌리고 있다. >---- >[[http://rexhistoria.net/history_discuss/173219|링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